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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Life

[군인, 어디까지 가봤니] 07. 뉴올리언즈, 언제나 재즈처럼

by 공군 공감 2015. 2. 27.




군인, 어디까지 가봤니

뉴올리언즈, 언제나 재즈처럼

 

이번 ‘군인, 어디까지 가봤니’의 주인공은 제3방공유도탄여단 본부 주임원사실에서 근무 중인 병 737기 여규진 상병이다.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주의 최대 도시인 뉴올리언스New Orleans는 18세기 중엽 미국이 독립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프랑스와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이 때문에 뉴올리언스 지역에는 군대를 환영하고 환송하는 행사가 잦았고 자연스레 군악대 연주가 발달했는데, 독립 후에도 여전히 군악대에서 사용하던 관악기를 중심으로 한 음악 문화가 발전하여 1900년대 초반 ‘재즈Jazz’라는 음악 장르로 재탄생한다. 여규진 상병이 여덟 명의 친구들과 함께 떠난 뉴올리언스 여행기를 통해서 축제와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커다란 울림을 느껴보자.

 

프롤로그

어렸을 때부터 나는 늘 새로운 것을 향한 동경을 마음속에 품어왔다. 낯선 장소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 처음 도전한 외국 음식, 우연히 틀었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음악,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악기……. 익숙하지 않은 만큼 새로운 경험은 나에게 더 깊고 선명한 인상을 주었다. 시간이 흘러 대학에 들어갈 무렵 나는 이미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낯선 장소에서의 생활이 나에게 좀 더 많은 경험과 생각을 안겨줄 거란 막연한 기대와 함께. 졸업하기 전까지 방학 때마다 시간을 내어 가능한 한 자주 여행을 하기로 했다. 미국은 주州마다 워낙 다양한 특색을 가진 곳이 많아서 마치 모든 주가 서로 다른 나라처럼 느껴졌다. 끝없이 먹어도 허기가 진 사람처럼 나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이미 다음에는 어디로 여행을 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1년 봄, 나는 친구들과 함께 뉴올리언스로 떠났다.

 

여행의 시작

두근거리는 여행의 시작, 앞으로 우리에게 펼쳐질 일들이 기대되는 한편 역시나 처음 마주한 뉴올리언스의 모습에 우리는 얼마간 어리둥절했다. 오랫동안 프랑스와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탓에 건축 양식과 도로가 연결된 모습이 여느 미국의 다른 도시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시각적인 생경함과 함께 나를 사로잡은 건 거리에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였다. 크고 작은 골목골목마다 사람들이 모여서 저마다의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그들의 연주실력과 그에 못지 않은 흥겨움은 가히 최고라 인정할 만했다. 가족 전체가 거리로 나와 악기 파트를 하나씩 맡아서 연주하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악기를 장만할 돈이 부족했는지 플라스틱 통을 두드리며 노래를 했다. 정말 장인은 도구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서울의 번화가를 걷다 보면 우리는 모든 상점에서 제각기 틀어놓은 시끄러운 음악 때문에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보여주는 풍경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뉴올리언스에서 내가 느낀 첫인상도 어쩌면 거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가지각색의 음악과 함께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그때 뉴올리언스 거리에서 들려온 음악은 별다른 기준이나 색깔 없이 단순히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해둔 번화가의 음악과는 달랐다. 그들은 그들 삶과 몸 안에 담긴 흥겨움을 도시의 풍경과 함께 밖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선 연주하고 노래했다. 뉴올리언스 시민들에게 음악은 관광객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지닌 강인한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운 좋게도 우리가 뉴올리언스를 여행한 기간은 크리스마스 시즌부터 시작된 마디그라Mardi Gras 카니발이 절정에 다다른 3월 초ㆍ중순이었다. 축제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인 술, 음악 그리고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술을 마시고 걷다가 노래를 부르고 또 춤을 추며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 같이 온 친구 한 명이 사라진 게 아닌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처음 본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친구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된 것이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우리는 이곳저곳을 찾아 헤매다가 삼십여 분이 지나서야 어느 골목에서 혼자 흥겹게 춤을 추고 있는 친구를 발견했다. 평상시라면 조금 당황스러운 경험이 됐겠지만, 모두가 함께 떠난 즐거운 여행—게다가 흥이 나면 날수록 더 좋은 축제였기에 지금은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는 경험이 되었다.

 

골목에서 광장까지

뉴올리언스를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것들은 골목으로부터 시작해 광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파리나 바르셀로나의 풍경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노천 카페부터 뉴올리언스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바Bar와 연극무대, 그리고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재즈 클럽까지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야기는 다름 아닌 ‘길바닥’으로부터 피어났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이 도시의 사람들은 밤이건 낮이건 이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함께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주변 건물들을 쳐다보았는데 많은 이들이 베란다에 서서 공연과 퍼레이드를 감상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로지 자신의 사적인 공간이라고 여겨지는 집 안(건물)과 완벽히 공적으로 사용되는 광장, 그리고 그 사이를 매개하여 사람들을 안에서 밖으로 인동하는 숱한 골목과 베란다의 풍경, 골목에서 시작된 모든 길은 광장으로 모여들었고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이러한 사이-공간Inter-Spaces)을 충만하고 성실하게 채우고 있었다. 비록 우리는 며칠 간의 관광객으로서 뉴올리언스를 방문했지만, 이처럼 흥겹고 열정적인 도시의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데 이바지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제야 뉴올리언스의 거리 문화를 제대로 즐길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안 순간이었다.

 

임프로비제이션, 인티그레이션

평소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인지 사람들이 나에게 자주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혼자 하는 여행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 둘 중 어떤 쪽이 더 매력적인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혼자서 여행을 떠난 적도 많았다. 늘 특정한 공동체에 속한 상태로 조직적인 생활과 사고방식을 강요받는 것이 답답해서 그들로부터 한 발치 떨어져 내가 어떤 사람인지 되돌아보고 싶었다. 그럴 때면 차에 올라타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선 망설임 없이 홀로 긴 여행을 시작했다. 반대로 가끔은 이번 여행처럼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함께 떠나기도 했다. ‘정말로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가자, 가자!’라는 외침으로 변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가방을 싸고 티켓을 알아보고 지도를 펼쳐 들고 있었다. 모두가 설레는 한마음으로 더 완벽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 여행이 도무지 어떻게 시작돼서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던 과정이 지금 생각해보면 진심으로 나에게 행복을 안겨주었던 것 같다.
흔히 재즈 연주는 각 파트의 연주자가 임의로 독주하는 임프로비제이션Improvisation과 모든 연주자가 합을 맞춰 연주하는 인티그레이션Integration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수 분간의 플레이에서 우리는 우선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정해진 리듬과 코드에 맞춰서 함께 연주하는 법을 배운다. 마디가 지나고 곡이 점점 진행될수록 연주는 개인의 성향이나 특징보다는 곡 전체에서 느껴지는 그루브를 앞세운다. 그리고 일순간 곡이 절정에 달했을 때 임프로비제이션, 즉 각 파트의 독주가 시작된다. 독주자는 곡 안에서 드러난 희로애락의 감정은 잠시 접어두고, 오직 그의 고독과 자유를 한껏 뽐내기 위해 연주한다. 그리고 그런 그를 위해서 나머지 연주자들은 평소보다 조금 더 숨을 죽인 채 그의 독주를 뒷받침한다. 8마디 이상의 임프로비제이션이 끝나면 독주자는 다시 곡으로 돌아와 다른 연주자들을 위해서 인티그레이션에 몰입하는 것을 반복한다. 이로써 재즈는 개인의 음악인 동시에 집단의 음악이 되는 셈이다.

다양한 목소리와 호흡, 그리고 자유로움과 그의 고독……. 이처럼 전혀 다른 성격의 플레이를 오가는 재즈 연주처럼 나의 여행도 임프로비제이션과 인티그레이션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다.때로는 나만의 방식대로 나만의 시간을 즐기면서, 또 다른 때에는 함께 여행을 떠난 동료들의 생각과 시선을 존중하면서 나는 내 인생과 여정에 있어서 매번 좀 더 나은 연주자가 되어가고 있다.

 

언제나 재즈처럼

이제 내 군생활도 거의 절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2년이라는 길고 복잡한, 정말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번 여행도 언젠간 끝이 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또 다시 어디론가 여행을 가지 않을까. 언제나 그리운 사람들이 기다리는 학교로 돌아가야 하고, 학교에 다니다 보면 다시 사회라는 전쟁터에 뛰어들기 위한 준비도 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지금까지 소홀히 대했던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만한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생각일 것 같다.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어떤 누군가에겐 정말 중요한 사람으로 남아 그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면서 살아가게 될 테니까.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이란 작품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 내가 이 그림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캔버스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여성들이 모두 제각기 구별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왼쪽의 세 여성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 익숙한 모습이지만, 오른쪽에 있는, 마치 아프리카의 전통 가면을 쓴 듯한 얼굴을 가진 두 여성의 모습은 당대의 전통적인 조형 혹은 회화기법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그나마 그림 속에서 제대로 된 모습을 가진 건 접시에 놓인 과일들 정도다. ‘아비뇽의 아가씨들’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은 내가 살아가는 공간과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고유성을 가지고 유기적으로 기대어 있는 상태에서 나에게 매우 독특한 인상을 남긴다. 동시대의 다른 그림들에서도 발견되는 것처럼, 재즈 음악 역시 누가 연주하고 누가 듣는지에 따라 참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그 어떤 것도 정답 혹은 원형原形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가 마주한 삶과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연주자도 곡에 흠뻑 빠져 끊임없이 연주하는 순간만큼은 아무런 말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나도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삶을 통해서 내가 나의 세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고 싶다.

 

여행시기: 2011년 3월

여행기간: 2박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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