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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Life

[군인, 어디까지 가봤니] 08. 독일, 끝은 또 다른 시작.

by 공군 공감 2015. 4. 7.





군인, 어디까지 가봤니 

독일, 끝은 또 다른 시작

이번 ‘군인, 어디까지 가봤니’의 주인공은 작전사령부근무지원단 지원대대에서 근무



































한 병 725기 이강한 예비역이다. 유럽대륙 중부에 위치해 오랜 세월을 거치며 동과 서로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온 독일은 이러한 역사적ㆍ사회적 상황에서도 수많은 철학자, 문학가 그리고 음악가를 배출해낸 예술가의 나라이다. 비단 예술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예술-인문학적 토

양을 기반으로 기술, 건축, 물리학, 생물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도 늘 명예와 품위를 잃지 않은 독일. 이강한 예비역이 그의 말년휴가를 할애하여 다녀온 독일 여행기를 통해서 젊은 날 2년 동안의 군생활이 끝나는 시점에서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고, 무엇을 했으며 또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 생각하는 자신만의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프롤로그

지난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전역일만을 기다려왔는데 막상 내 발 앞에 떨어진 건 ‘복학’이라는 무거운 짐과 잠시나마 숨 돌릴 수 있는 말년휴가가 전부였다. 얼마 전 독일에서 유학 중이신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아버지는 내가 사회로 돌아가기 전에 독일에 먼저 머물면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넓은 마음을 가지라고 하셨다. 전화를 끊고 독일행 비행기를 타는 상상을 하면서 행복했

지만 아직 군인이라는 내 신분 때문에 이내 풀이 죽었다. 매일 24시간을 편하고 익숙한 환경에서 살기를 반복해왔는데 다시 새로운 환경에 발 디딜 수 있을까. 외국어로 대화하기는커녕 우리말로도 재미없고 뻔한 이야기만 하면 어쩌지 걱정이었는데……. 긴 여름이 지나고 하루하루 해가 짧아질수록 독일 여행에 대한 기대와 설렘은 커졌고, 그만큼 남은 내 군생활도 빠르게 지나가는 듯 느껴졌다. 현역복무 중이었기에 필요한 행정절차가 더러 있었지만 귀찮음과 피곤함 속에서도 조금씩 가닥




이 잡혀가는 여행계획을 훑어보며 뿌듯했다. 

프랑크푸르트

약 11시간 30분의 비행이 끝나고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아버지가 계신 베를린으로 이동하기 위해 다시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선의 항공기가 드나드는 만큼 공항 자체의 크기는 물론 내부에서 진행되는 출입국 절차도 굉장한 규모로 이루어졌다. 출입국 게이트를 지나자 대부분의 승객들이 이체에ICE, Intercity Express를 타기 위해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열차는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쾰른Köln 등 공항과 인접한 독일의 주요 도시를 거쳐 유럽대륙 전역으로 연결되는 장거리 노선과 프랑크푸르트 도심 중앙역으로 여행객들을 안내하는 단거리 노선이 두 개의 터미널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유레일패스 티켓을 구매하고 약 1시간 정도의 기다림 끝에 나는 베를린행 초고속열차를 탈 수 있었다. 플랫폼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기차를 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내가 독일에 왔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당연한 듯 정해진 시간에서 단 몇 초도 차이 나지 않는 시각에 도착하는 기차와 그다지 붐비지 않는 늦은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반듯하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늘 정교하고 단단하게 제작되어 사용자에게 커다란 신뢰를 주는 독일제 기계장치에 담긴 정신은 단순한 기술력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바로 시민과 국가가 질서와 체계를 존중하는 마음에서부터 비롯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베를린

사실 이전까지 영화에서 봤던 베를린은 과잉된 민족주의에 사로잡힌 나치즘과 이에 선동된 독일 국민들의 모습이거나 전쟁 이후 동과 서로 갈라져 첨예한 이념대립을 앞세운 정치적 음모가 가득한 풍경이었다. 거칠게 들리는 말투를 사용하고 딱 벌어진 덩치에 각진 얼굴을 한 사람들이 주는 인상 때문에 동양인인 나로서는 여행 이후 줄곧 묘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고속열차에서 내린 뒤 베를린 중앙역을 걸어 나와 내가 처음 발견한 건 오히려 등허리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와 오랜 피로를 풀어주는 의외의 풍경이었다. 포근하고 조용히 퍼진 주황색 가로등 불빛으로 채워진 거리와 골목, 역 앞에서 친구와 가족, 연인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로 빠르게 퍼지는 차고 습한 북유럽의 공기. 지금까지 기대한 독일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나는 색의 농담濃淡과 한기寒氣만으로 이루어진 베를린의 풍경에 반해버렸다.

서쪽으로는 벨기에와 프랑스 동쪽으로는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등 유럽 중부의 주요 국가들 사이에 있는 독일은 지리적ㆍ종교적ㆍ정치적 이유로 역사상 유럽대륙에서 일어났던 여러 차례의 커다란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과거 프로이센 왕국 시절부터 21세기 독일까지 같은 공간에서 일어난 수 많은 사건을 여러 세대에 걸쳐 공유하고 교육하며 또한 반성하기 위해 독일 국민들은 비록 전쟁을 거치면서 생긴 아픈 상처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축물이더라도 그것을 없애거나 박제하여 전시하는 방식 대신 당시 모습 있는 그대로를 보존하여 공개해두는 쪽을 선택하였다. 베를린 중심에 지어진 카이저-빌헬름 기념 교회Gedächtniskirche는 이와 같은 도시 디자인 정책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라고 한다. 1895년에 완성된 기념 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무차별 공습으로 파괴되었지만, 당시 전쟁의 참혹함과 공포를 되새기는 의미에서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보수하지 않았다고 한다. 폭격으로 무너져내린 교회 외벽을 바라보면서 전쟁의 여파와 분단의 아픔이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이 자연스레 생각났다. 비록 타국의 역사와 정취를 통해서 떠오른 감상이었지만, 지난 2년 동안 헌신을 다해 지켜온 조국의 현재가 어떤 모습인지 다시 한 번 상기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뮌헨

뮌헨은 베를린에서 ICE로도 7시간이나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먼 도시이다. 도심을 벗어나 먼 거리를 이동하는 내내 넓은 초원과 풍력발전기 그리고 동화책에 그려져 있던 목조주택들을 볼 수 있었다. 먼 곳을 바라보기에 나를 방해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어 행복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니 내 마지막 군생활을 보내면서 느꼈던 감정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끝이 보이지 않는 벌판에서 마땅히 기준이랄 것도 없는 길을 묵묵히 걸으며 내가 걷는 방향이 정말 옳은 방향인지 어느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시간이 2년이나 지났다.

드레스덴

소포클레스 이래로 흐르는 강물은 끊임없는 역사의 변화와 역동성에 비유되곤 한다. 뮌헨에서의 인연으로 찾은 독일 남동부의 드레스덴은 엘베Elbe강을 중심으로 한 아름다운 도시였다. ‘독일의 피렌체’라고 불리는 드레스덴은 16세기 말 바로크 문화부터 18세기 중엽의 로코코까지 조형예술, 제조업, 화학 등 독일 기술Kraft 분야의 오랜 전통 위에 쌓아올려진 우아한 문화와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그러나 드레스덴 역시 세계대전의 상처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무차별 폭격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고 그것으로 이 도시가 지닌 아름다움도 끝이 나버리는 듯했다. 전쟁 이후 드레스덴은 도시 전체에 걸쳐 복원사업을 진행하였는데, 특히 과거 도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가톨릭 궁정 교회Hofkirche는 폭격으로 검게 변해버린 외벽 위로 밝은 흰색 벽돌을 얹어 재건되었다. 이제는 당시의 상황을 거의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복원된 도시를 걸으면서 내가 보아야 할 것은 과거 역사가 증명하는 영광의 빛조차 모두 삼키려 드는, 검게 흘러내린 벽돌을 따라 생긴 경계였다. 엘베강 주변에 지어진 가톨릭 궁정 교회를 중심으로 한 드레스덴는 한때 유럽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신성하며 또한 가장 품위있는 장소이자 터전으로 존재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도시는 그곳을 ‘집으로’ 삼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탐욕과 무지로 인해 자신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려 바닥까지 주저앉았음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빛나는 흰색 벽으로서 드러내는 방식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마치 군생활 끝자락에 와서야 내가 지금까지 이토록 긴 추락 속에 있었음을, 그러나 어쩌면 나는 다시 쌓아올려지기 위해서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음을 오랜 벽돌을 통해 도시 전체의 목소리로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프라하

출국을 며칠 앞두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여행지인 체코 프라하에 들렀다. 체코어로 ‘문턱práh’이란 의미에 어원을 두고 있는 프라하는 나의 시선을 자꾸만 위쪽으로 잡아끄는 힘을 가진 곳이었다. 문턱이란 늘 두 영역 사이를 가로지르며 동시에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프라하 중심을 가로지르는 볼타바 강에서 서서히 솟아올라 성-비투스-대성당 첨탑에서 절정을 맞는 도시의 선skyline은 눈앞의 도시 풍경을 하늘과 대지 두 영역 사이로 이어주었다. 프라하 풍경이 지닌 수평과 수직적 구도는 완만함과 격렬함을 오가며 도시의 긴장과 조화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거리의 사람들이 향하는 길을 따라 쉬지 않고 걷다 보니 카를교Karlův most에 도착했다. 도시의 서쪽과 동쪽을 잇는 이 다리는 오래전부터 서유럽에서 동유럽으로 이어지는 문화적ㆍ경제적 교류에 있어서도 중심 가교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놓여 둘 사이의 균형을 꾀하고 그곳을 ‘건너’ 가도록 우리를 묵묵히 인도하는 다리. 지금 내 인생은 군대와 사회 사이에 놓인 다리 위에 서 있다. 어느 한 막幕의 끝에서 또 다른 시작을 위한 걸음을 내딛기 전, 카를교 위에서 두 눈을 감고 ‘저쪽’에서 바라볼 ‘이쪽’ 모습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를 생각했다.

에필로그

2주 동안의 아쉬운 여행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오르자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은 아직 군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대 안팎으로 마음이 자리 잡지 못하고 혼자 방황하던 시기에, 전역과 복학을 동시에 준비해야 하는 바쁜 시기에 마냥 걱정을 미뤄놓고 떠난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이 나에게 어떤 용기와 격려가 되었는지 아직은 실감 나지 않지만 아마도 이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때쯤이면 나는 이미 군대보다는 사회가 더 익숙한 모습으로 변해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꿈은 넓게, 젊음은 의미 있게.”라는 문구를 본 적이 있는데 이번 ‘군인, 어디까지 가봤니’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과 이 문장을 나누고 싶다. 자신이 감당할 수조차 없는 넓은 벌 중간에 서서 스스로 의미 있는 길을 걷고 있는지 되돌아볼 기회였던 긴 여행을 끝내며 이제 나는 다시 새로운 걸음을 준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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